日서 건너온 ‘김옥균 행서’… 2년 얼었던 문화교류에 봄기운
- 중앙박물관 3·1운동 100주년 전시, 日 사노시박물관 소유 작품 눈길- 도난 불상 반환 판결뒤 첫 교류… 日측 “한국 진심담긴 설득에 대여” - 배기동 관장 “경색 푸는 마중물로”2017년 우리나라 법원의 일본 쓰시마(對馬)섬 불상 반환 거부 판결 이후 명맥이 끊겼던 한일 문화재 교류가 2년 만에 재개됐다.2017년 한국 법원의 쓰시마 불상 판결 이후 2년여 만에 처음으로 고국으로 나들이 온 일본 내 한국 문화재들. 1886년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김옥균이 후원자 스나가를 위해 써 준 글씨. * 일본 사노시향토박물관 제공 *중앙일보 뉴스캡쳐22일 국립중앙박물관에 따르면 16일부터 개막한 특별전 ‘근대 서화, 봄 새벽을 깨우다’에 출품된 100점의 서화 가운데 일본 사노(佐野)시 향토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한국 서화 8점을 대여했다. 일본 박물관의 한국 문화재 대여는 2017년 1월 이후 처음으로, 최근 정치적으로 경색된 한일 관계에 숨통을 틔워줄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국립중앙박물관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준비한 이번 특별전을 위해 한국의 근대 서화를 소장하고 있는 사노시 향토박물관에 오랫동안 공을 들였다. 하지만 개관 이래 한 번도 한국에 유물을 빌려준 적이 없던 박물관 측은 고심을 거듭했다. 16일 전시 개막식에서 만난 모테기 가쓰미(茂木克美·56) 사노시 향토박물관 주간은 “시청과 시의회에서 한국에 유물을 빌려주면 안전하게 돌려받을 수 있느냐는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며 “이에 사노시장과 함께 도쿄의 주일 한국대사관을 찾아가 진심이 담긴 한국 측의 보증을 듣고, 흔쾌히 대여를 결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번에 고국을 찾은 문화재는 1884년 갑신정변을 이끈 김옥균(1851∼1894), 박영효(1861∼1939) 등 개화기 지식인들의 글과 그림 8점이다. 이 중 눈길을 끄는 작품은 김옥균이 행서체로 쓴 ‘도가 통하면 하늘과 땅이 같은 곳(道契則霄壤共處)’이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할 당시 일본인 후원가 스나가 하지메(須永元·1868∼1942)에게 써준 것이다. 사노시 출신인 스나가는 일본 근대화의 창시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를 사사한 부유한 지식인이었다. ‘젊음’과 ‘개혁’이라는 공통된 키워드를 가지고 있던 김옥균 등 한국의 개화파 일원을 후원하며 그들의 정신과 글씨를 흠모했다고 한다.1916년 일본에서 황철이 그린 ‘전적벽부도’(왼쪽 사진). 길이 2.5m에 이르는 황철과 지운영의 합작 ‘산수도’. 일본 사노시향토박물관 제공 *중앙일보뉴스캡쳐이 밖에도 우리나라에 최초로 사진을 도입한 황철(1864∼1930)의 그림과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됐던 오세창(1864∼1953)의 글씨가 적힌 벼루함 등도 전시된다. 사노시는 도치기(栃木)현에 속한 인구 약 12만 명이 사는 소도시. 사노시 향토박물관 역시 규모는 작지만 일본에서 가장 많은 2000여 점의 한국 근대 서화를 보유하고 있다. 소장품 6만여 점 가운데 1만5000여 점을 차지하는 ‘스나가 하지메 컬렉션’ 덕분이다.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한일 문화재 교류는 2017년 1월부터 전면 중단됐다. 한국인 절도범들이 2012년 10월 쓰시마섬의 한 사찰에서 훔친 고려시대 불상을 원래 소유주로 추정되는 충남 서산시 부석사로 돌려주라는 판결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불상은 국내에 남았지만, 일본 문화재계에선 한국과의 교류에 찬바람이 불었다. ‘압류면제법’(해외 문화재를 들여와 전시할 때 압류·압수를 금지하는 조항)이 없는 한국에 유물을 빌려주면 돌려받지 못한다는 불신이 커졌다. 지난해 고려 건국 1100주년을 맞아 열린 특별전 ‘대고려전’ 때도 일본 국립도쿄박물관 등이 소장한 고려시대 불화와 나전칠기 5점의 대여를 거부하기도 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오세창의 글씨가 적힌 벼루함. *일본 사노시향토박물관 제공 *중앙일보뉴스캡쳐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번 전시가 경색된 한일 관계를 푸는 마중물이 됐으면 한다”며 “앞으로 일본 내 한국의 근현대 문화재에 대한 연구와 교류를 확대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기사 및 사진출처 - 중앙일보2019.04.23글씨21편집실
국보급 한국 서예… 중국 현대미술을 만난다
▶ LACMA 기획전 3제, 명필 창암 작품 등 선봬… 고려 목판술·조선 금속활자 조명도 ▶ 1980년대 중국 휩쓴 물질주의 영향은 아이 웨이웨이 등 21명 작품으로 고찰오는 5월12일 LACMA 소장전 ‘선과 선 사이: 타이포그래피’가 개막하고 6월2일 중국현대미술전 ‘물질의 매력’, 그리고 6월16일 대규모 한국 서예전 ‘선을 넘어서: 한국 글씨 예술’이 관람객들의 발길을 머물게 할 예정이다. 타이포그래피 소장전은 미적 가치를 위해 글자를 이용한 디자인 작품들을 전시하고 중국현대미술전은 1980년대 중국 사회 전반에 개방이 이루어지면서 찾아온 물질주의를 고찰한 중국 작가 21명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다. 특히 아시아권을 벗어나 처음으로 열리는 한국 서예전은 고려의 뛰어난 목판술과 조선의 금속활자 등 모든 인쇄술의 발명에서 서양을 앞질렀던 한국의 인쇄술에 주목한 전시다. 한국 서예전 ‘선을 넘어서: 한국 글씨 예술’ (Beyond Line: The Art of Korean Writing) 오는 6월 미 서부 최대 규모의 미술관인 LA카운티뮤지엄(LACMA에서 대규모 한국 서예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한국 서예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기획전으로 LACMA가 국립예술기금(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과 현대자동차 아트랩의 지원을 받아 시행한 ‘현대 프로젝트: LACMA의 한국 미술 장학금 사업’의 일환이다. 아시아 미술에 조예가 깊은 스티븐 리틀 LACMA 큐레이터가 서예 전시를 제안, 4년간 조사 연구 끝에 마련한 이번 전시 ‘선을 넘어서: 한국 글씨 예술’(Beyond Line: The Art of Korean Writing)는 전서부터 현대 글씨까지 다루고 있다. 오는 6월16일 레스낙 파빌리언에서 개막해 9월29일까지 열리는 LACMA 한국 서예전은 아시아 밖에서는 처음으로 열리는 대규모 기획전이다. 2,000년에 걸쳐 한국 역사 속 한자에서 한글, 그리고 왕과 학자, 화가, 승려, 노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계층에서 나온 작품들을 전시한다. 특히 고려시대 목판술(918~1392)과 조선시대 금속활자(1392~1897)를 조명하며 인쇄술의 발명을 통해 본 한국의 기술 혁신을 고찰한다. 조선 후기 3대 명필로 꼽히는 창암 이삼만 선생의 작품을 비롯해 서예가 김종원, 동양화가 서세옥, 시각디자이너 안상수 등이 참여한다. 여간해서 한국 밖으로 나오지 않는 국보급 작품들을 LACMA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한국 서예전 참여작가 및 작품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추후 발표될 예정이다. 중국 현대미술전 ‘물질의 매력’ (The Allure of Matter: Material Art from China) 1980년대 이후 중국사회는 개방의 물결로 인해 물질적으로는 이전보다 풍족해졌지만 개인주의와 물질주의, 치열한 경쟁, 신빈곤층의 대두 등 혼란이 찾아왔다. 1979~90년대 미술그룹 ‘싱싱사회’ 등장, 1985년 ‘신사조 운동’에 이어 89년 이후 중국 현대미술은 ‘차이니즈 팝’으로 불린 냉소적 리얼리즘이 대거 등장했다. 위에민준, 왕광이 등이 대표 작가로 이들은 청년기에 문화대혁명, 천안문 사태를 경험한 세대들이다. 관념주의와 이상중의에 회의적이고 반체제, 반정부 성격을 띄며 물질만능주의의 상업적 요소까지 작품에 포함시켰고 이들의 냉소성, 허무성 같은 표현적 요소가 중국 미술의 한 스타일을 형성했다. LACMA가 오는 6월2일 BCAM 2층 전시실에서 개막해 2020년 1월5일까지 전시하는 중국현대미술전 ‘물질의 매력’은 1980년대 이후 물질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던 중국 현대미술가들을 소개한다. 특히 비전통적, 자연적, 합성적 재료를 활용한 다양한 미디어 작업이 40여 년간 이어진 아티스트들의 창작 인생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 참여작가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1위로 꼽히는 중국의 건축가이자 설치미술가 아이 웨이웨이(Ai Weiwei) ▲화약이라는 소재를 작품에 도입해 설치 작품을 제작하는 ‘폭발 이벤트’ 시리즈 작가 차이 궈 치앙(Cai Guo-Qiang) ▲ ‘호흡, 텐안문 광장’과 ‘호흡, 호하이’ 등 퍼포먼스 사진 작품으로 알려진 송 동(Song Dong) ▲문자와 유사한 것들로 만든 가짜 문자 ‘천서’와 중국의 서예 예술과 서양의 영어 알파벳을 결합해 만든 새로운 문자언어 ‘스퀘어 워드 캘리그래피’로 유명한 쉬빙(Xu Bing) ▲ ‘수트케이스에 넣은 도시’ 등 포터블 시티 시리즈로 주목을 받은 중국여성작가 인시우전(Yin Xiuzhen) 등 21명이다. LACMA가 처음 공개하는 ‘물질의 매력’ 기획전은 시카고 대학 스마트 뮤지엄 오브 아트, 시애틀 아트 뮤지엄(SAM), 피바디 에섹스 뮤지엄에서 순회 전시를 갖는다. LACMA 컬렉션 ‘선과 선 사이: 타이포그래피’ (Between the Lines: Typography in LACMA’s Collection) 타이포그래피는 비주얼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으로 꼽힌다. 그래픽 디자인 작업에서 글자 타입을 선택, 구성, 배치하는 것은 관객이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세기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디자이너들은 글자의 간격과 형태에 대한 결정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분위기를 파악했고 타이포그래피를 사용해 페이지의 단어를 재구성했다. 타이포그래피는 활자와 그 조판, 인쇄술에 관한 것만을 지칭했으나 현대에 들어와서는 문자의 서체와 디자인, 조판방식, 인쇄방식 등과 그에 따른 인쇄물의 조형성, 가독성, 독이성 등에 관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LACMA의 그래픽 디자인 이니셔티브의 일환으로 2014년 이후 기증받은 LACMA 컬렉션들 중 30점 이상의 포스터와 간행물을 전시해 20세기 중반부터 현재까지 인쇄술에 대한 접근 범위를 보여준다. 이번 기획전은 찰스 앤 레이 언스, 에이프릴 그레이먼, 코리타 켄트, 타케노부 이가라시, 폴 랜드, 마시모 비넬리, 볼프강 바인가트 등 국제적 명성이 있는 아티스트들의 작업들이 장식한다. 2019.04.23글씨21편집실
연주세영첩 등 조선시대 서첩 2점 경기도문화재 지정
경기도는 22일 조선 시대 문신의 친필이 편철된 서첩인 연주세영첩(漣朱世榮帖)을 도 유형문화재로, 선청선생첩(仙淸先生帖)을 문화재자료로 지정했다. 연주세영첩에 담긴 우암 송시열 친필[경기도 제공]연주세영첩은 우암 송시열이 친필로 쓴 서문과 조선 후기 문신 학자들의 친필시가 기록돼있는 데다 당대 인물들의 교유관계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학술적, 서예 사적 가치가 돋보이는 자료라고 도는 설명했다. 선청선생첩은 조선 중기의 명문가 안동 김씨 집안의 김상용과 그의 아들, 아우들의 시문·편지·민사 등 총 26편을 묶은 서첩으로 당대 문인들의 삶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있어 역사·학술·서예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았다. 선청선생첩에 담긴 서문[경기도 제공]두 서첩은 송시열 가문의 후손이 보관해온 개인 소장품이다. 이로써 경기도 문화재는 유형문화재 299점, 무형문화재 8점, 기념물 183점, 민속문화재 12점, 문화재자료 177점 등 모두 739점으로 늘어났다. 도는 이와 별개로 이날 고양 상운사 석불좌상 등 5점을 도 유형문화재로, 분청사기 상준 등 2점을 문화재자료로 지정예고 고시했다. 한 달간 의견을 수렴해 검토한 뒤 7월 중 확정 공고할 방침이다.*뉴스출처 - 연합뉴스2019.4.23글씨21편집실
제51회 강암연묵회전
제51회 강암연묵회전이 4월 24일(수)부터 29일(화)까지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진행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한글, 전각, 문인화등 다양한 서화의 매력을 느낄 수 있으며, 강암연묵회 회원 121명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강암연묵회(회장 산민 이용)는 51년 전인 1968년 2월 19일에 서예술 연구를 통해 우리나라 서예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창립하였다. 임지당 이은혁作창립된 해 10월에는 전국 최초의 지방 서예공모전인 ‘제1회 전라북도서예전람회’를 개최하였고, 이 공모전은 이듬해에 전국 최초의 지방 미술공모전이기도한‘전라북도미술전람회’로 계승되기도 했다. 행공자 진영근作1982년에는 국제교류전인 ‘한중이문연의전’을 이곳 전주에서 개최하였고, 이후 서울과 대만의 타이페이, 카오슝 등지를 오가며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기 전부터 국제교류전을 진행해왔다. 미산 정현숙作강암연묵회는 지난 51년의 세월 동안 많은 업적을 남기며 성장해왔다. 처음에는 전주를 중심으로 강암선생님을 모시고 선비정신과 서예술을 갈고 닦아오던 것이 지금은 전국 모든 지역의 작가들이 한데 어울려 한국서예의 큰 물줄기를 이루고 있다. 하석 박원규作이렇듯 제51회 강암연묵회전에서는 국내 서예발전에 큰 기여를 해오며 전통과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강암연묵회의 독자적이고 뿌리 깊은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2019.4.24글씨21편집실<전시정보>기간 : 2019. 4. 24(수) - 4. 29(월)장소 : 한국소리문화의전당(전북 전주시 덕진구 소리로 31 )
2019 여초서예관·소전미술관 특별기획
소전 손재형 • 여초 김응현 대표작품 교류전 특별하고 낯선 만남, 소전 손재형과 여초 김응현의 특별기획전이 열렸다. 2019여초서예관과 소전미술관의 특별기획으로 개최된 이번 전시는 두 대가의 명품 서화작품 약 60점이 각 서예관과 미술관에서 1, 2차 교류전으로 개최되었다. 이 특별하고도 낯선 만남은 여초서예관 조준형 학예사의 기획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애초에 당대에 명성이 있는 여러 서예가 중 ‘4대가’라고 일컫는 소전 손재형, 여초 김응현, 일중 김충현, 검여 유희강 이 4인의 기획 교류전을 구상하던 중 소전 손재형 선생의 자제분을 소개받는 기회가 생겼고, 그 기회로 이번 교류전을 펼칠 수 있었다고 한다. 여초서예관 오픈식 모습여초서예관 오픈식 모습 조준형 학예사는 ‘이번 교류전이 있기까지는 소전, 여초 두 어른의 자제분들이신 손흥(진도고등학교 이사장)선생님과 김형년(동방연서회 이사)선생님께서 적극 협조해주신 덕으로 성사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작품 선정 과정에서부터 상대 측에 결례가 될 수 있는 작은 부분까지 섬세히 신경 쓰고자 했습니다.’라고 교류전의 성사와 진행과정이 신중하게 치러졌음을 전했다. 여초서예관 전시장 모습여초서예관 전시장 모습 이번 교류전을 논하기에 앞서 소전 손재형, 여초 김응현 두 선생의 일생과 그 일생에 담긴 인문학적 소양과 예술적 표현까지 좀 더 깊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두 선생을 기억하는 이들의 이야기에서는 실로 ‘대단했다’, ‘굉장했다’라는 공경을 넘어 숭상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초서예관 전시장에서 소전 손재형 선생의 작품설명여초서예관 전시장 모습‘서예’라는 명칭을 정착시키다 - 소전 손재형 소전 손재형(1903-1981) 선생은 한국예술과 현대서예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고 할 수 있는 국한 혼용의 독창적인 ‘소전체’는 전예풍의 필획으로 조화로운 변화를 이루어냈다. 글씨와 그림 모두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르며 대한민국 당대의 손꼽히는 서예가 소전 손재형, 예술가뿐 아니라 수집가로서 한국전쟁 당시 경복궁에 소장되어 있던 국보유물이 북(北)으로 유출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고, 안전히 부산까지 이전시킨 일화로 볼 때 소전의 높은 안목, 남다른 사명감과 용기는 당대는 물론 현재까지 그의 명성이 이어지는 역사적인 업적이다. 소전 손재형소전 손재형 作소전 손재형 作소전 손재형 그는 진도 출신으로 양정보고를 졸업, 선전(국전)에서 입선과 특선을 했고 해방이 된 후 조선서화동연회를 결성하여 회장직을 맡았다. 1929년 외국어학원 독일어과를 졸업,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교수 역임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소전 선생은 일본으로 건너가 폭격을 무릅쓰고 한 달여간 동안 거듭된 설득과 어마어마한 값을 치러내고 추사의 ‘세한도’를 찾아왔다. 목숨을 걸고 이뤄낸 기적 같은 업적으로 당시 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로부터 큰 칭송을 받았다. 소전 손재형 作소전 손재형 作 서단의 원로로서 한국서예발전에 힘쓴 소전은 이후 1954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8년 자유당에 입당하여 제4개 민의원에 당선,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 1978년 예술원 종신회원, 국민훈장과 무궁화장·모란장을 받았다. 소전 선생은 서예가이자 교육자로서, 또 문화행정가이자 정치가로서의 폭넓은 서예가의 삶을 남겼다. 창조적 예술가이자 우리나라의 문예 부흥을 이끌었던 소전은 명실상부 현대서예의 출발점에 있다. 소전미술관 전시장 모습소전미술관 전시장 모습소전 손재형 作 높은 안목의 수장가로서 국보급 문화재를 지켜내고, 서예라는 명칭을 주창하였으며 금석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조준형 학예사는 “소전 선생이 많은 이들로부터 추앙받을 수 있었던 것은 언급한 몇 가지 업적 때문만을 아닐 것입니다. 소전체에서 느낄 수 있는 넉넉하고 절도 있는 필의는 소전 선생의 인품 그 자체일 것이며, 이는 그의 서품 및 화품으로 그대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넉넉한 인품으로 창조적 예술세계를 자유롭게 펼친 소전은 앞으로도 더욱 추앙되고 주목되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당대를 장악했던 소전 손재형 선생에 대해 평했다. 소전미술관 전시장 모습활발한 국외교류의 선두자 - 여초 김응현 여초 김응현(1927-2007) 선생은 명필가 집안 출신으로 남다른 가풍과 선비정신 속에서 성장하였고, 한평생을 서예연구과 보급을 위해 헌신하였다. 1956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예전문 아카데미 <동방연서회>를 창립하여 서예저변 확대에 크게 기여함을 물론, ‘전국학생휘호대회’를 통해 서예를 통한 민족정신의 고취와 문화 부흥을 이끌었다. 또한, 글씨 뿐 아니라 전각에서도 특출한 경지에 올라 1980년 한국전각학회(現 한국전각협회)를 결성하여 현재까지 한국 전각예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여초 김응현여초 김응현 作여초 김응현 作 일찍이 국외교류에 중요성을 간파한 여초 선생은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인으로서 대만,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학술, 문화적 교류를 활발하게 이끌어냈다. 둘째 형인 일중 김충현, 셋째 형인 백아 김창현과 함께 형제 서예가로도 유명한 여초 선생은 휘문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1950년부터 10년 가까이 국회도서관에서 국회보 주간으로 일했다. 한국전쟁 당시 1.4 후퇴를 맞아 부산으로 피난을 간 여초 선생이 ‘주간춘추’라는 주보를 발간하며 주간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여초 김응현 여초 김응현 作여초 김응현 作 조준형 학예사는 ‘피난시절, 먹고 살 걱정이 최우선인 그때에도 여초 선생님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각계각층으로부터 책 3,600여 권을 기증받아 <국회도서실>을 개관하였는데, 이것이 현재 <국회도서관>의 전신입니다. 제대로 된 월급을 받지 못했지만, 오직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열정을 다하였고, 특히 나라가 어려울수록 교육의 힘이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라고 전했다. 기본(교육)에 충실함으로써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노력했던 여초 선생의 사고(私考)는 서예에 있어서도 특히 서법연구와 교육에 힘썼으며, 엄격한 서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연스러움을 찾고자 노력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초 김응현여초 김응현여초 김응현 作 이후 서예잡지 ‘서통(書通)’과 ‘서법예술’을 창간한 바 있다. 1996년 이후에는 설악산 백담사 부근으로 거처를 옮겨 글씨에 전념하였으며, 사고로 오른쪽 손목을 다친 뒤에는 2000년과 2001년 좌수서 작품을 모아 ‘좌수전’을 열기도 하였다. 다시 이들의 교류전으로 들어가 보자, 이번 전시에서는 여초서예관과 소전미술관의 소장 작품을 위주로 한 교류전으로 총 60~70여 점이 출품되었다. 그중 대표작을 보면, 소전미술관에서는 소전 한글의 ‘충무공벽파진전첩비(1956년作)’이 대표작으로 선보여졌다. 높이 355cm의 대형 작품으로 소전 선생의 고향 진도 벽파진에 세워져 있는 비문을 탁본한 것이다. 노상 이은상 선생의 글로 충무공의 애국정신을 선양하는 의미가 담겼다. 소전 필생의 회심작으로 독자적인 양식과 새로운 법도를 개척한 일대 걸작이라고 평가되는 작품이다. 여초 김응현 作 여초서예관에서는 ‘김상헌 서간초당우음(1979년作)’이 대표작으로 꼽혔다. 여초 선생의 선조인 청음 김상헌의 서간시를 특유의 고졸하며 활달한 행서체로 표현한 이 작품은 너비와 높이가 60cm정도 되는 비교적 작은 크기이다. 그러나 여초의 전성기로 평가되는 시기의 작품으로 글자체에서 풍기는 힘은 결코 적지 않다. 실제로 이 작품은 여초서예관 건물의 외벽에 대형으로 석각 되어 있는 등 평소 관람객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소전미술관 전시장 모습 소전과 여초, 여초와 소전 서로 다른 색깔을 지닌 두 거장 서예라는 예술을 볼 때, 작품에서 그 사람을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두 선생의 생애 업적, 활동들을 살펴보기만 하더라도 1950년대 이후 한국서예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어림잡아볼 수 있었다. 이번 기획교류전은 말 그대로 당대 서예계를 장악했다고 하는 두 선생의 작품을 교류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될 것이다. 강원도 인제군 소재인 여초서예관과 전라남도 진도군에 있는 소전미술관이다. 사실상 두 서예관과 미술관의 위치만으로도 두 거장의 만남은 애초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게다가 당시 소전 선생의 행보에 20년 후배인 여초 선생은 자신의 소신을 강조하며 맞불을 놓았던 패기는 서예계를 매우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화는 당대를 이끌었던 이들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소전미술관 오픈행사 모습 앞서 말한 것처럼 두 선생의 작품교류라는 것에도 큰 의미가 있지만, 이번 교류전에서 우리는 단순히 당대에 유명했던 두 분의 만남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본질에 다가가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여초서예관과 소전미술관에서 기획한 이번 교류전이 바라보고, 나아가고자 했던 본질은 서예의 부흥이 아닐까 생각된다. 두 선생이 활동했던 시기엔 서예가 이렇게까지 쇠퇴할 것이라 미처 가늠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전미술관 전시장 모습 그들의 뛰어난 소질이나 능력, 역량으로만 서예를 발전시켰을까? 물론 당시는 현재와 시대적 , 환경적 차이점이 있었으나 1900년 중반, 당대에 있었던 두 분의 용기와 패기, 서예에 대한 지극한 애정으로 지켜내고 발전시켰다고 감히 논하고 싶다. 이번 특별기획 대표작품 교류전을 통해 다시 한 번 알아본 소전 손재형, 여초 김응현 선생의 작품과 업적을 통해 두 선생의 깊은 뜻에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이 자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법고창신의 자세는 현재 우리 서단에서도 자각하고 지켜나가야 할 기본적인 정신이자 사명일 것이다. 2019. 4. 25김지수 기자자료제공 : 여초서예관 조준형 학예사 / 소전미술관 <전시 정보>2019 여초서예관•소전미술관 특별기획소전 손재형 • 여초 김응현 대표작품 교류전기간 : 1차_여초서예관2018. 11. 17 ~ 2019. 2. 172차_소전미술관2019. 3. 21 ~ 2019. 6. 23장소 : 1차_여초서예관(강원도 인제군 북면 만해로154)033-461-40812차_소전미술관(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철마길 29)061-540-6283
여태명 展 - 평화와 번영
3·1운동 100주년 기념과2018.0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1주년 기념 ‘평화와 번영을 심다’기념비의 글씨를 쓴 서화가 여태명 교수의 개인전이 서울 중구 이화아트갤러리에서 개최되었다. 지난 2018년 4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일 국무위원장이 화해와 평화의 약속으로 ‘평화와 번영을 심다’라고 쓰인 기념비 앞에서 악수를 나눈 장면이 생생하다. 여태명 교수는 남북정상회담 1주년을 맞이하여 그날의 감동을 기억하고 평화를 앞당기는 염원으로 기념전을 준비하였다. 축사중인 한승헌 전 감사원장과 여태명 교수또, 이번 전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우리 민족의 갈망인 평화와 통일 그리고 민족번영을 기원하는 의미가 함께 담겨있다. 여태명 교수는 촛불현장과 외국의 행사장 등 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활동을 이어왔다. 평화나무 408x138書 160419 50x56(上) 天·地·人 190301 360x88(下) 天·地·人 190302 540x88여태명 교수는 우리민족의 정서를 바탕으로 그림과 글씨를 재해석하며 호방한 작품세계를 선보여왔다. 평생 연구한 ‘민체’는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으로 이번 전시에서 서예와 그림에 함께 어우러져 감상할 수 있다. 韓字 子·母 24x30四方志 125x70전시작품에는 주제인 ‘평화’라는 단어를 ‘폴란드어, 체코어, 아랍어, 헝가리어, 나오어, 칸나다어, 한글, 영어 등 다양한 국가의 언어를 붓으로 표현해 서예의 다채로움을 확장하여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또 전시장 한편을 가득 메우는 가로548cm 세로137cm 크기의 대작으로 구성된 ’平和, 和平‘ 이라는 작품은 이번 전시의 대표작품 중 하나로 여태명 교수의 힘 있는 필의로 많은 관람객들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기미독립선언서 492x135또 3·1운동 10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길이 5m의 기미독립선언서는 광개토대왕비의 한자와 훈민정음, 용비어천가의 한글서체가 조화롭게 혼용되어 여태명 교수만의 독창적인 서체를 선보였다. (좌) 국민이 지킨 역사 국민이 이끌나라 15x58(우) 斥洋斥倭 14x57.5여태명 교수는 개인전 21회, 서울과 파리(Michel Sicard) 2인전 등을 개최한바 있으며, 현재 한국서예학회, 한국전각학회, 한국문인화협회, 한국현대서예협회의 이사,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명예회장, 한국민족서예인협회회장직을 맡고 있으며, 세계서예쩐북비엔날레 조직위원, 집행위원을 역임했다. 먹과 붓으로 세상을 그려내는 서화가 여태명 교수의 서화, 도자기 작품 등 60여점에서 민중의 삶과 염원을 느껴보길 바란다. 2019. 4. 26취재 김지수 기자 <전시 정보>여태명 展 - 평화와 번영기간 : 2019. 4. 20 ~ 4. 30장소 : 이화아트갤러리(서울 중구 정동길26 이화백주년기념관B1)문의 : 여태명 010-6688-9940
선(線) 위에 선(立)
0.75평에서 붓을 든 사람들 인권운동 사랑방과 인권재단 사람은 4월 17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라이프러리 아카이브에서 \'0.75평에서 붓을 든 사람들-선(線) 위에 선(立)\'이라는 제목으로 장기수 선생들의 서예작품 전시회를 진행 중이다. ‘선(線) 위에 선(立) _ 0.75평에서 붓을 든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전시회에서 류낙진, 박성준, 석달윤, 신영복, 안승억, 오병철, 이구영, 이명직, 이준태 아홉 분의 5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이 작품들은 장기수 선생님들이 출소하고 1990년대 초반 인권운동사랑방에 기증해주셨던 작품들이며, 옥중에서 썼던 작품들도 있고, 출소 후 쓴 작품들도 있다. ▲ 오병철 선생님이 지금도 사용하는 문방사우교도소에서 10년 동안 목공반 활동을 하면서 직접 나무를 깎아 문진을 만들었다고 한다.이번 전시 기간 동안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 선생 등 여러 장기수들의 출소 과정부터 지난 2000년 9월 송환된 63명의 평양 도착 상황까지의 사진 30여점도 함께 관람할 수 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인권재단 사람은 \"온 국민을 들뜨게 했던 4.27 판문점 선언 1주년을 앞둔 지금, 감옥 안팎에서 분단의 선이 만들어 낸 지독한 폭력을 견디며 붓을 들었던 장기수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붓이 그려낸 선 위에서 경계인으로 살아온 장기수들의 고통과 아픔에 귀 기울일 때 분단의 선이 아닌 서로를 연결하는 새로운 선이 만들어질 것이다.\"라며 기획의도를 밝혔다. 이번 전시는 분단폭력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사람들을 다시 기억하는 시간을 갖게 해준다. 경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장기수 선생님들의 고통과 아픔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분단체제의 전환을 이야기하는 지금 우리 사회가 함께 기억하고 마주해야 할 과제로 되새겨지고 이야기될 것이다. 오병철 선생이 감옥에서, 그리고 지금도 붓글씨 연습을 하기 위해 보는 서예교본이다.전시는 매일 오전 11시부터 저녁 7시까지이며, 월요일은 휴무이다. 문의는 라이프러리 아카이브(02-363-5855, 02-725-2080)2019.4.29이승민기자<전시정보>선 위에 선2019년 4월 17 ~ 30일라이프러리 아카이브(서울시 종로구 인사동길50 3층)
3.1운동 100주년 기념 한국서예정예작가전
2019년 올 해는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을 외쳤던 3.1만세운동과 임시 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러한 뜻 깊은 해를 맞이하여 천도교가 주최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한국서예 정예작가전’을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지난24일(수) 개최하였다. 한국서예정예작가협회 회원들은 이러한 정신을 마음에 새기며 평화와 호국열사들에 대한 깊은 마음을 작품으로 다양하게 표현하였다. 전통서예의 고박한 아름다움부터 현대서예, 캘리그라피의 개성 있는 작품들까지 회원들 각자의 운치와 필력을 마음껏 선보이는 장이였다. 한국서예정예작가협회 양정모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뜻 깊은 해를 맞이하여 천도교가 주최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한국서예정예 작가전은 의미가 깊다. 이러한 행사를 본 협회가 주관하는 일은 영광이다.”라며 “다소나마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고 정신을 이어받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밝혀 이번 전시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우리 선현들의 피와 땀으로 지켜낸 이 나라에서 사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하며 애국이 무엇인가를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번 2019 3.1운동 100주년 기념 한국서예정예작가전이 그런 깊은 마음을 다시 한 번 울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2019.4.30이승민기자<전시정보>3.1운동 100주년 기념 한국서예정예작가전기간 : 2019년 4월 24일(수) - 30일(화)장소 : 인사동 한국미술관
국립한글박물관 개관 5주년 기획특별전
<공쥬 글시 뎍으시니: 덕온공주 집안 3대 한글 유산> 덕온공주 가족과 후손들의 왕실 한글 유산이 한자리에서 만났다. 지난 4월 25일(목) 국립한글박물관(관장 박영국)은 개관 5주년을 맞이하여 2019년 첫 번째 기획특별전으로 <공쥬 글시 뎍으시니: 덕온공주 집안 3대 한글 유산>을 개최하였다. 이번 전시는 2016년 기획특별전 <1837년 가을 어느 혼례날: 덕온공주 한글 자료>에 이어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 집안의 미공개 한글 유산을 소개하는 두 번째 전시이다. 축사중인 박영국 국립한글박물관장2016년부터 2019년 1월까지 수집한 400여 점의 유물 중 덕온공주와 아들, 손녀 3대의 한글 자료와 유품 200여 점을 처음으로 망라하여 공개된다. 특히 올해 1월에 국외소재문화재재단으로부터 이관받은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1844)의 『ᄌᆞ경뎐긔』를 포함하여 덕온공주의 언니 복온공주의 글씨첩, 덕온공주의 아들 윤용구(尹用求, 1853-1939)가 한글로 쓴 중국 여성 전기 『동사기람』 등 중요 유일본 자료들을 최초로 선보인다. 또 손녀 윤백영(尹伯榮, 1888-1986) 3대의 한글 자료를 비롯하여 덕온공주의 부모님 순조와 순원왕후, 오빠 효명세자의 자료가 한자리에 소개되었다. 덕온공주가 한글로 쓴 ‘자경전기’. 19세기 / 32×528cm 국립한글박물관 제공이번에 소개된 덕온공주 가족들의 한글 자료는 조선 왕실에서 어떻게 한글로 소통하고 가족 간의 정을 나누었을지 짐작하게 한다. 처음 공개되는 『복온공주글씨첩』(개인 소장)은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1832)가 12살 때 한글로 쓴 시문을 모은 첩으로, 순조(純祖, 1790-1834)가 점수를 매기고 종이와 붓 등을 상으로 내린 기록이 함께 적혀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복온공주의 유일한 글씨인 동시에 조선의 왕이 자신의 딸에게 직접 글쓰기를 가르쳤음을 보여주는 중요 자료이다. 오빠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의 『학석집』(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은 왕세자가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누이들을 위해 자신의 한시를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조선 시대 남성 문집 중 유일한 한글본이다. 또 이번 전시에 처음 소개되는 자료 중 한글을 통해 가족 간의 따뜻한 사랑을 전하는 것들이 많다. 덕온공주가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의 명으로, 아버지 순조의 글을 한글로 풀어 쓴 『ᄌᆞ경뎐긔』와 어머니가 주신 『고문진보언해』(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를 베껴 쓴 「양양가」, 「비파행」 등에는 부모님을 생각하는 딸의 마음이 담겨 있다. 덕온공주의 아들 윤용구는 딸 윤백영이 12세 되던 해에 모범이 될 만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뽑아 『여사초략』을 써주었고, 그 마음을 이어받은 윤백영도 아버지의 한글 역사서 『동사기람』 등을 베껴 쓰며 평생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였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유교 사회였던 조선 시대에 누구나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인 동시에 군왕에게는 나라의 안위를 지키고 태평성대를 불러오는 가장 근본이 되는 마음가짐이었다. 조선 시대에 부왕이 한문으로 쓴 글에 담긴 뜻을 공주가 이어받아 한글로 옮겨 쓴 사례는 극히 드물다. 5미터 넘는 길이의 종이에 정성스럽게 쓴 『ᄌᆞ경뎐긔』에서 부모의 가르침을 받들고자 했던 공주의 효심이 잘 드러난다. 전시장에서 아버지 순조의 『자경전기』와 함께 만날 수 있다. 왕실의 한글 궁체를 현대로 이어준 덕온공주의 손녀 윤백영은 할머니와 아버지의 한글 글쓰기를 이어 받아 평생 한글을 쓰고 가꾸었다. 궁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 궁할머니로 불린 윤백영은 왕실문화와 한글 자료에 대한 소중한 기록을 남겼다. 이 집안에 전해오는 다수의 한글 자료 필사자와 관련 내력을 알 수 있는 것도 윤백영의 기록 덕분이다. 전시장에는 덕온공부의 혼수 물품 목록, 철인왕후 친필 한글 편지 등 윤백영이 쓴 부기 부분을 찾아보는 것으로 관람에 흥미를 더할 수 있다. 윤백영은 42세였던 1929년 한글 궁체로는 처음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고, 이후 많은 한글 서예 작품을 남겨 왕실 한글 궁체의 품격을 오늘날 우리 일상이 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하였다. 『한나라 명덕황후 마씨 전기』 등 윤백영이 평생 동안 쓴 다양한 한글 서예 작품과 서사書寫 상궁, 철인왕후 등의 한글 궁체를 함께 비교해 볼 수 있다. 축사중인 정재숙 문화재청장이번 전시에서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한글로서 마음을 전한 자료를 볼 수 있는데, 덕온공주의 아들 윤용구는 덕온공주가 순원왕후에게 하사받은 『고문진보언해』(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가 저동궁(덕온공주와 윤의선의 살림집) 화재로 일부 없어지자 68세 때 그것을 보충해서 쓰고 기록을 남겼다. 이후 장서각에 소장된 윤용구의 『정사기람』80권 중 권19(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는 한국전쟁 때 분실된 것을 윤백영이 77세 때 보충하여 채워 넣은 것이다. 어머니 덕온공주를 생각하는 아들 윤용구의 마음은 지극했고, 그 마음은 딸 윤백영에게로 이어졌다. 윤백영이 쓴 한글 서예 「공주 칭호」, 「녈녀 공강」, 「결혼 초법」 등은 아버지의 역사서 『동사기람』의 내용을 베껴 쓴 것이다. 아버지와 딸 윤용구와 윤백영이 앞부분과 뒷부분을 이어 쓴 『관혼상제 예법』은 이들 부녀의 각별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 덕온공주와 윤용구, 윤백영 3대의 글씨가 한데 모인 자료도 있다. 덕온공주가 쓴 『족부족』 뒷면에 아들 윤용구가 한자 뜻풀이 『자의』를 쓰고, 손녀 윤백영이 그 기록을 남겼다. 2016년 기획특별전 <1837년 가을 어느 혼례날: 덕온공주 한글 자료>에서 아들과 딸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막내딸 덕온공주의 혼례를 홀로 준비하는 순원왕후의 애틋한 모정을 볼 수 있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덕온공주 가족과 그 후손들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한글을 통해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따뜻한 가족 사랑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그밖에도 전시장에서는 덕온공주 집안이 왕실과 주고받은 한글 편지를 통해 옛 한글 편지의 특성을 살펴보는 공간도 마련하였다. 순원왕후, 명성황후 등의 편지에서 지금은 사라진 궁중어와 옛 한글 편지의 높임 방식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국립한글박물관 전시운영팀이번 전시의 연계 문화 행사로 덕온공주 가족의 왕실 잔치를 통해 조선 왕실의 한글문화를 체험하는 <해설리 있는 궁중무용과 음악(5.25)>을 개최할 예정이며, 관련 강연과 교육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기획전에서 미처 보여주지 못하는 덕온공주의 집안 한글 유산을 올해 안으로 발간되는 연구 총서를 통해 소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 자료 하나하나에 역사성을 갖는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보여주며, 이는 다양한 분야에서 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는 한글문화 자원이다. 이 전시를 계기로 더욱 활발한 관심과 연구가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2019. 5. 2김지수 기자 <전시 정보>국립한글박물관 개관 5주년 기획특별전<공쥬 글시 뎍으시니: 덕온공주 집안 3대 한글 유산>기간 : 2019. 4. 25 ~ 8. 18장소 : 국립한글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
성인근의 글씨를 읽다-11
인장, 존재를 증명하는 새김 요즘 수제도장이 유행이다. 전통과 문화의 거리 인사동에 간판을 내건 수제도장집이 여럿 생겼고, 인터넷 사이트를 활용한 업체들이 서로 경쟁하듯 성업하고 있다. 재료나 기법 면에서 새로운 상품을 출시해 다양한 양상으로 확대하고 있으며, 내용 면에서도 아기도장, 띠도장, 커플도장, 신앙도장 등 고객의 구매력을 자극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그간 인장업계가 주도해온 딱딱한 기계식 인장에서 탈피하여 손으로 직접 자신의 이름을 새겨준다는 매력적인 마케팅으로 보인다. 자신을 나타내는 상징어인 ‘이름’과, 새김을 통해 그 존재를 증명하는 ‘인장’을 갖고 싶은 욕망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1. 고서나 족보를 보다보면 이름 위에 비단 천 조각이 붙어있는 경우를 가끔 볼 수 있다. 이는 조상의 이름을 보기조차 황송하여 가린 조처였으니,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일은 더욱 삼갈 일이었을 터이다. 또한 고서점에서는 장서인(藏書印) 부분이 검게 칠해져 있거나 아예 도려내진 옛 책을 간혹 발견하는데, 후손들이 집안 어른의 이름이 남에게 함부로 읽히거나 불림을 꺼려한 조처였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이름은 개인을 나타내는 상징어이자 언어부호이다. 여기에는 직·간적접으로 개인이 속한 집단을 비롯한 민족의 가치관과 세계관 등이 녹아 있다. 예컨대 가족, 종족, 종교, 국가 등 다양한 문화가치를 담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수명천고(垂名千古)’, ‘만고유명(萬古留名)’ 등의 어구를 만들어 이름에 의미를 부여해 왔다. 즉 이름이 한 사람이 살아가는 시대뿐 아니라 그 이름 속에 담긴 공과(功過)가 오랜 시간 역사로 남는다는 교훈이라 하겠다. 또한 전근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중요한 가치로 여겼던 ‘입신양명 이현부모(立身揚名 以顯父母)’는 자신의 이름을 드날려 부모나 가문을 드러내는 일을 효의 궁극적 가치로 보는 인식을 잘 보여준다. 살아 있는 동안의 영예도 중요하지만, 빛나는 이름이 길이 후세에 전하기를 더욱 바랬다. 훌륭한 이름을 후세에 전하는 일을 개인사 최고의 이상이자 효도의 최고 순위로 여겼던 인식이다. 1798년 정조(正祖)가 좌상(左相)에게 보낸 편지의 봉함인(封緘印)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정조는 자신이 직접 지은 아호를 새겨 봉함인으로 사용했다. 《정조어찰》, 개인소장. 현재 한국에서는 생애 최초의 이름을 특별한 이상이 없는 한 사망 때까지 사용한다. 그러나 전근대의 이름은 생애의 여러 주기마다 바꾸어 나가는 방식이 관례였다. 태어나면서 아명(兒名)을 지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관명(冠名)이 주어졌다. 이름을 존중한 동양문화의 관념으로 자(字)를 두어 이름을 대신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여러 별칭을 써서 사람의 인격을 대신했는데, 아호(雅號)·당호(堂號)·별호(別號)·택호(宅號) 등이 그 예이다. 또한 사후에는 시호(諡號)를 두어 죽은 이에게 인격과 공과의 의미를 부여했다. 2. 인장은 문자를 역상(逆像)으로 제작하여 찍어낸다는 측면에서 활자와 유사하지만 기원은 활자보다 앞선다. 인쇄술이 탁본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지만 표면에 안료를 바르고 압력을 이용해 찍어내는 방식이나, 문자를 거꾸로 제작한다는 점에서 인장이 좀 더 유력한 모태로 여겨진다. 따라서 인장의 제작과 사용은 인쇄술의 기원보다 앞선다 하겠다. 인장의 기원은 기원전 약 5,000년 전 메소포타미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둥근 인장의 몸통에 무늬를 새기고, 이를 진흙에 굴려 요철을 만든 방식이 시초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원통형 인장 이후로도 인장문화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다. 고대 이집트의 풍뎅이 모양 인장, 고대 인도의 모헨조다로에서 출토된 인장, 그리스ㆍ로마에 이은 유럽의 반지형 인장, 태국의 상아로 만든 불탑 인장, 이란에서 발견한 페르시아 제국의 원통형 인장 등 전 세계적으로 각양각색의 인장문화가 있어왔다. 고대 이집트의 반지형 인장.기원전 약 1,500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필자 촬영(2018. 3). 다양한 세계의 인장들이 어떤 경로를 따라 전파되었는지는 규명하기 어렵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첫째, 견고한 물질에 문양이나 글자를 새겨 요철을 만든다는 점, 둘째, 인장을 찍을 때 진흙을 사용하였다는 점, 셋째, 개인이나 집단을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한 점, 넷째, 물건이나 문서의 봉인을 목적으로 하였다는 점 등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는 초기 인장의 모습은 대부분 원통형으로 진흙에 굴려 요철을 만드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인장사의 출발점에 있는 중국의 경우 이러한 사례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인장의 밑면에 새겨 찍는 방식만이 나타난다. 또한 현재까지 인장을 사용하고 있는 나라는 동아시아 3국을 비롯하여 베트남ㆍ인도네시아ㆍ라오스ㆍ말레이시아ㆍ싱가포르 등 남아시아에 집중되어 있으며, 예술과 학문의 분야인 전각(篆刻)으로 이어지고 있는 나라는 한국ㆍ중국ㆍ일본 등에 불과하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인장 「용문수고(龍門壽考)」. 용문산처럼 오래기를 기원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용문산은 현재 경기도 양평에 위치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필자 촬영(2018. 1). 한편 우리시대와 직․간접적 영향이 큰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자신의 이름 외에도 여러 용도의 인장을 제작하여 사용했다. 성명은 물론 자(字), 호(號), 관향(貫鄕) 등을 새겼고, 자신이 좋아하는 경전구절이나 시구를 새겨 인장으로 쓰기도 했다. 또한 서책이나 서화에 자신의 소유임을 밝히기 위한 수장인(收藏印)이 있고, 편지봉투에 봉함의 목적으로 쓴 봉함인(封緘印)도 모두 우리 선조들이 곁에 두고 애용했던 인장들이다. 성인근(본지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