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회 세연회전
<세연회전> 죽림 정웅표 선생을 사사하는 서우들의 모임인 세연회(洗硯會)가 일곱 번째 작품 전시회를 인사동 백악미술관에서 전시오픈을 알렸다. 세연회에는 길게는 이십여 년이 넘게 또 짧게는 불과 일 이년 전에 입회한 회원들까지 서예가 좋아 모인사람들의 모임이다. 세연회 회원일동은 “매회 전시가 거듭될수록 우리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죽림선생님이라는 큰 나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부족한 제자들의 작품 하나하나를 검토해 주시고 가르쳐 주신 선생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전하였다. 죽림 정웅표 선생은 이날 오픈식에서 일중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들을 예로 들며 회원들에게 글씨를 쓰는 사람의 마음과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하여 전하였다. 특히 전시를 준비하면서 작품을 할 때 도움이 되는 현실적인 조언들을 주며 큰 가르침을 전하여 사제지간의 따뜻하고 훈훈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세연회전은 그저 잘 쓰고 멋진 작품들을 관람하는 전시가 아니다. 단순히 완벽한 장법과 필획, 구성을 감상하고 싶으면 이 전시를 관람하는 것보다 다른 전시를 가는 것이 더 좋겠다. 이번 전시는 붓을 사랑하고 먹 향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순수하게 모여 즐기며 만든 도전의 장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성장 과정과 도전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전시장을 방문하게 된다면, 회원들 개개인의 애정과 노력이 담긴 작품들이 그 어떤 명작보다 귀하고 값지게 느껴지게 될 것이다. 세연회전은 1월16일(수)까지 백악미술관에서 진행된다. <전시정보>제 7회 세연회전기간 : 2019년 1월 10일(목) - 1월 16일(수)장소 : 백악미술관 전관2019.1.11취재 이승민기자
진공재 칼글씨 초대전
<진공재 칼글씨 초대전>‘우리 시대의 마지막 천재’라고 불리는 전각가 공재 진영근의 칼글씨 초대전이 인사동 조영 스페이스에서 열렸다. 전시장을 가득 채운 그의 ‘칼글씨’ 작품들이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벼룻돌에 제주 사오기 나무(*왕벚나무의 제주 방언)에 표구한 작품들은 섬세하게 그려낸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전각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는 일반 관람객들도 충분히 쉽고 깊게 느낄 수 있는 전시이다. 이번 전시의 타이틀은 ‘갑골문 칼글씨 展’이다. 작가는 작품 활동을 하면서 글씨에 대한 탐구의식이 들었다고 한다. 글씨의 원리를 찾아 들어가다 보면 전서가 나오고 갑골이 나온다. 이렇듯 갑골문은 글씨의 근원이자 뿌리인 것이다. 바로 여기에 작가가 ‘갑골에게로’라는 전시 부제를 단 이유가 있다. 갑골문으로 다시 돌아가 글씨에 대한 연원 탐색을 하여 좀 더 깊이 다시 흘러들어가 더 넓은 곳으로 가고자 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전시를 관람하다 보면 부처님 말씀을 새긴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작가는 물론 기독교적 작품들도 하지만, 불교의 좋은 말들이 많아 그런 것을 새기고 쓰고 하다 보니 불교의 심오한 뜻을 함축하고 있는 작품을 가끔 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번 전시에서 단순히 글씨만을 새긴 작품들이 아니라 나무 밑에 있는 쌍학을 비롯해 십이 간지의 동물들, 십장생, 아름다운 색을 가진 그릇들 등 다양한 주제의 전각 작품들을 확인할 수 있어 다채로운 전각 예술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이에 작가는 전각 예술을 마음에다 새기고 마음을 새기는 행위라고 하였다. “나는 전각을 심각(心刻)이라고 표현한다. 刻은 마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새길 수 있다. 문자도 새기고 그림도 새기고, 생각도 새기고,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전하여 작가의 ‘칼글씨’에 대한 각별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공재 진영근 작가이렇듯 이번 공재 진영근의 \'갑골문 칼글씨 展\'을 관람한다면 작품에 대한 진한 여운이 관람객들 마음속에 깊이 새길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번 전시는 1월 15일(화)까지 인사동 조영 스페이스에서 진행된다.<전시정보>대한민국마지막 천재 칼잡이의 갑골문 칼글씨전 - 갑골에게로-기간 : 2019년 1월2일(수) - 1월 15일(화)장소 : 조영 스페이스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39 성지빌딩 2층)2019.1.11이승민 기자
율산 리홍재 60년 名品展
<율산 리홍재 60년 명품전>획이 꿈틀거리면서 살아 숨 쉬는 듯한 타묵 퍼포먼스로 유명한 서예가 율산 리홍재가 그의 서예 인생 60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개인전을 지난 8일 봉산문화회관과 도심명산장에서 개최하였다.서예는 정적이고 지루하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어 거리감을 느끼는 일반인들에게 그의 타묵 퍼포먼스는 그야말로 서예의 신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큰 붓을 들고 길거리에서 춤을 추듯 붓을 마음껏 휘두르는 행위 속에서 활기찬 리듬감과 획의 생명력이 고스란히 느껴지게 하기 때문이다. 타묵퍼포먼스 중인 율산 리홍재 *사진출처 월간 여성시대“서예는 음악이요, 춤이요, 스포츠다. 사람들은 서예가 붓으로 글을 쓰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글씨 안에는 음률과 리듬이 있고, 그 안에 인생철학이 포함돼 있다. 우리는 흔히 활자가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악보를 갖고 연주하면 살아 움직이는 음악이 되듯, 글씨 또한 혼을 불어 넣으면 살아 움직이는 예술이 된다.” 율산 리홍재는 서예를 이렇게 정의했다. 작품 \'龍氣風德\' 앞 율산 리홍재(가운데)리홍재 作 │ 龍氣風德437X143cmX2율산 리홍재의 작품설명을 듣기 위해 많은 관람객들이 집중하고 있다.이런 그가 그의 서예 인생 60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이번 전시에는 율산의 서예 인생 전반을 망라하는 시서화 100여 점을 선보였다. 특히 그중에 새로 선보이는 ‘만자행(萬字行)’ 연작이 보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德’, ‘和’, ‘氣’등 세필로 수많은 작은 글씨를 안에 빼곡하게 채워 얼핏 보면 그림 같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글자를 재창조하여 회화처럼 표현한 모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선보이는 타묵 퍼포먼스와는 또 다른 그의 예술세계라고 생각된다. 리홍재 作 │ 和 93x67cm리홍재 作 │ 德 50x50cm작품 \'덕\'을 보면 덕(德) 자를 가운데 크게 휘호한 뒤 오행에 따라 화면을 동서남북 중앙으로 나눠 오방색으로 수많은 작은 글씨를 썼다. 중앙의 토(황색)는 황제를 상징하는 색상인데 덕을 세상에 베풀면 곧 세상의 주인이 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는 ‘만자행’을 비롯하여 그동안의 타묵퍼포먼스 결과물도 함께 설치하여 전시장을 방문한 관람객들에게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그의 60년 서예 인생의 철학과 예술세계를 총망라한 이번 전시는 1월 8일(화)부터 13(일)까지 봉산문화회관과 도심명산장에서 함께 열렸다. <전시정보>율산 리홍재 60년 명품전기간 : 2019년 1월 8일(화) - 13일(일)장소 : 봉산문화회관(제 1, 2, 3전시실) 도심명산장(제 4 전시장) 2019.1.14글씨21 편집실
덕온공주가 손수 쓴 「자경전기」, 「규훈」 등 총 68점 환수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자료,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다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조선의 마지막 공주인 덕온공주가 한글로 쓴 「자경전기(慈慶殿記)」와 「규훈(閨訓)」을 비롯한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자료>를 지난해 11월 미국에서 매입해 국내로 들여왔다.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자료>는 윤씨 집안으로 하가(下嫁, 공주가 시집을 감)한 조선 23대 임금 순조의 셋째 딸인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1844)와 양자 윤용구(尹用求, 1853-1939), 손녀 윤백영(尹伯榮, 1888-1986) 등 왕실 후손이 3대에 걸쳐 작성한 한글 책과 편지, 서예작품 등 총 68점이다.자경전기(慈慶殿記)* 자경전기(慈慶殿記): 1808년 순조가 정조비 효의왕후의 명에 따라 창경궁 자경전에 대해 쓴 책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자료>의 귀환은 국내기관 간 협력을 통한 문화재 환수의 모범 사례로,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지건길)과 국립한글박물관이 각자의 전문성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이루어낸 성과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유물에 대한 정보를 발견·수집하여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제공하였고,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소장자와 접촉과 매입 협상을 통해 유물을 국내로 들여오는 데 성공했다.여사초략(女史抄略) 이번에 환수된 자료들은 조선왕실의 한글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이중에서도 덕온공주가 아름다운 한글 궁체로 손수 쓴 「자경전기(慈慶殿記)」와 「규훈(閨訓)」이 주목을 끈다. 두 책은 모두 본래 한문으로 쓰여 있던 것을 덕온공주가 한글로 번역해 작성한 자료로, 덕온공주가 쓴 것으로는 이번에 처음 발견되어 희소가치가 높다. 규훈(閨訓)* 규훈(閨訓): 여성들이 지켜야 할 덕목과 예절에 관한 책 또한, 이번에 환수된 자료에는 왕실에서 작성한 한글 편지와 왕실 여성들을 위한 한글 역사서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신정왕후(순조의 세자인 익종의 비이자 헌종의 어머니) 편지*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선 제23대 순조의 세자인 익종(翼宗)의 비이자, 제24대 헌종의 어머니 한글 편지들은 덕온공주의 어머니 순원왕후가 사위 윤의선(1823~1887)에게 딸의 근황을 묻는 편지를 비롯하여, 신정왕후(추존왕 익종 비), 명헌왕후(헌종 계비), 철인왕후(철종 비), 명성황후(고종 비) 등이 직접 쓰거나 상궁이 대필해서 덕온공주 집안에 보낸 것들이다. 이 중에는 조선 최고의 한글 명필로 알려진 궁중여성 서기 이씨(書記 李氏)가 대필한 편지도 있어 사료적 중요성이 크다.순원왕후(덕온공주의 어머니) 편지 한글 역사서에는 「정사기람(正史紀覽)」과 「여사초략(女史抄略)」 등이 있는데, 「정사기람」은 덕온공주의 아들 윤용구가 고종의 명을 받아 왕실 여성들을 위해 쓴 역사책이며, 「여사초략」은 윤용구가 당시 12살이던 딸 윤백영을 위해 여성과 관련된 역사를 발췌해서 작성한 책이다. 정사기람(正史紀覽) 이외에도 덕온공주의 손녀인 윤백영의 서예작품이 눈에 띄는데, 윤백영은 일제강점기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한글 궁체로 쓴 서예작품으로는 처음으로 입선하였으며, 전통적인 한글 궁체를 현대적인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환소군전(桓少君傳 이번에 환수된 68점의 한글 자료는 조선 왕실 여성들의 생활 속에서 한글이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줄 뿐만 아니라 왕실에서 사용하였던 아름다운 한글 궁체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을 지낸 국어학자 이종덕 박사는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 자료>는 기존에 소개된 단편적인 왕실 편지나 소설과는 차원이 다른 자료로서, 왕실 부마 집안의 일괄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왕실인물의 개인적인 삶을 엿볼 수 있어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환수의 의의를 밝혔다. 문화재청은 <덕온공주 집안의 한글 자료>를 국립한글박물관에 이관하여 더욱 전문적으로 연구, 활용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보도자료 및 사진 출처 : 문화재청2019.01.16글씨21 편집실
김달진미술연구소 『미술인 인명사전』(2018) 발간
김달진미술연구소 『미술인 인명사전』(2018) 발간김달진미술연구소(소장 김달진)는 문화체육관광부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연구 결과로 『미술인 인명사전』(2018)을 발간하였다. 발간된 인명사전은 <한국 미술 기초자료 구축 및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작년 7월말부터 연말까지 진행된 연구의 결과물이다. 수록대상은 1850년부터 1977년까지 출생한 미술인 6,000명으로 작품활동을 펼치는 창작미술인 과 전시기획자, 미술평론가, 미술사가, 갤러리스트, 미술품보존과학자 등의 비창작미술인을 아우른다. 비율은 창작미술인 86%(5,157명), 비창작미술인 14%(843명)로 일반에서는 알기 어려웠던 창작미술인 외의 전문가들도 다수 확인이 가능하다. < 창작미술인 > 수록정보① 성명 ② 출생지③ 학력 ④ 전시⑤ 행정 ⑥ 레지던시⑦ 수상 ⑧ 연구(출판)⑨ 현직⑩ 작고미술인 중 작품도판< 비창작미술인 > 수록정보① 성명 ② 출생지③ 학력 ④ 행정⑤ 연구(출판)⑥ 수상 ⑦ 현직연구책임자 김달진 소장은 이번 인명사전을 통해 미술계 종사자들 뿐 아니라 일반에서도 근대와 현대, 한국과 외국 같은 시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한국미술에 대한 보다 넓은 이해를 가질 수 있길 기대한다고 설명하였다. <한국 미술 기초자료 구축 및 활성화 사업>은 김달진미술연구소에서 한국근현대미술의 연구기반강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추진해오고 있는 연구사업으로서 이전까지 『대한민국미술인인명록Ⅰ』(2010), 『한국미술단체자료집 1945-1999』(2013), 『한국미술전시자료집Ⅰ 1945-1969』(2014), 『한국미술전시자료집Ⅱ 1970-1979』(2015), 『한국미술전시자료집Ⅲ 1980-1989』(2017), 『한국미술전시자료집Ⅳ 1990-1999』(2018)와 같은 결과물이 일반에 공개된바 있다. 이번에 발행되는 인명사전은 주요 국공립도서관 및 대학도서관, 국공립미술관 등 유관기관에 인쇄자료로 배포되어 해당 기관의 열람규정에 따라 확인이 가능하며, 디지털파일(PDF)은 예술경영지원센터(gokams.or.kr) 온라인 자료실과 김달진미술연구소(daljin.com) 게시판에 공개되어 국민 누구든지 다운로드 받아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보도자료 및 사진 출처 : 김달진미술연구소2019.01.16글씨21 편집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서예교육 강사과정 교수작품전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서예교육 강사과정 교수작품전 동방문화대학원 대학교 서예교육 강사과정을 지도하고 이끌어주는 교수진들의 작품전이 17일 인사동 백악미술관에서 오픈식을 가졌다. 권창륜 석좌교수이 날 오픈 식에는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박경재 총장, 초정 권창륜 석좌교수, 정하건 원로 서예가, 심은 미술관 전정우 관장 외 여러 내빈들이 참여해 자리를 함께 빛내주었다. 축사를 맡은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박경재 총장은 “이번 전시회가 한국서예의 얼과 혼이 담긴 서예를 계승, 발전시키고 나아가 새로운 작품으로 국내외 서예 애호가들로부터 관심과 애정을 받길 기원드리며, 여러 교수님들의 작품세계도 날로 발전하길 바란다.” 라고 밝혔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박경재 총장이번 전시는 한국 서단을 이끌어가고 있는 교수진들이 모여 만든 전시이다. 한문, 한글, 전각, 문인화 등 여러 분야의 중심에 있는 교수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서예교육 강사과정 이영철 책임교수는 전시 도록 서문을 통해 “고졸(古拙)을 지켜가면서 현대성에 적응하고, 현대성에 적응해 가면서 그 경박함에 빠지지 않는 즉 전통성과 현대성의 조화를 갖춘 작품이 많습니다. 『논어(論語)』에 문질빈빈(文質彬彬)이란 말이 있듯이, 문화(文華)와 질실(質實)의 조화를 취한 작품들을 찬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라고 밝혀 전시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서예교육 강사과정은 올해 9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들은 동방의 고전과 예지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공부하여 한국 서단에 배출된다. 이후 다양한 활동으로 서단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으며, 서예의 예술성을 널리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다. 이러한 배경 뒤에는 여러 교수들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번 전시를 관람한다면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진들의 멋진 필치(筆致)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는 1월 23일(수)까지 인사동 백악미술관에서 진행된다.<전시 정보>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서예교육강사과정 교수작품전기간 : 2019. 1. 17(목) ~ 1. 23(수)장소 : 인사동 백악미술관 전관 <참여 작가>석좌교수 초정 권창륜도정 권상호 현암 김옥봉 설초 김정민 석정 김진영늘빛 서정수 죽암 여성구 여촌 이상태 원당 이영철담운 이일구 돌내 임분순 우정 정응균 삼도헌 정태수현암 소병돈2019.1.18이승민기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국새가 46만에 한국으로 돌아온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임정의 국새가 한국으로 돌아온다. 임정 임시의정원 의장 및 국무령을 지낸 만오 홍진 선생의 손자며느리인 신창휴씨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홍진 선생의 동상이 국회에 건립되는 날 남편이 보관해 온 임시의정원 관인을 국회에 기증할 것”이라고 밝혔다.大韓民國 三年(1921년) 一月 一日 임시정부급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기념촬영 / 이미지 출처-네이버이미지 검색이 관인은 오늘날 국회 격인 임시의정원의 각종 공문서에 찍었던 도장으로 임정 임시헌법 조항으로 볼 때 임정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국새 가운데 하나에 해당한다. 손자 며느리인 신씨가 동아일보에 공개한 이 관인은 검은색 목제도장으로 ‘臨時議政院印(임시의정원인)’이라고 새겨졌다. 손자 홍석주씨는 “할아버지(홍진)가 1945년 충칭에서 갖고 돌아왔다. 1919년부터 의정원 인장으로 쓰인 임시의정원인”이라고 설명한 문서를 남겼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이 관인을 온전히 간직해 왔으며, 1973년 미국 이민 뒤에도 조부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길 바라며 여러 차례 관인을 한국에 기증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16년 87세로 눈을 감았다. 1919년부터 쓰인 \'임시의정원印\' / 이미지 출처-동아일보아내인 신씨에 따르면 남편 홍씨는 이 도장을 목숨처럼 지켰다. 6.25전쟁, 일본유학(교환교수), 미국 이민 등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남편이 6.25정쟁 피란 당시 도장주머니를 베개에 돌돌 말아 넣고 잠을 잘 때도 그 베개만 썼다. 가족들에게도 도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리지 않았다.”고 전했다. 홍석주씨가 가족에게 남긴 도장과 문서 원본에는 “영구 가보로 보관할 것, 햇볕과 습기에 쬐이지 말 것”이란 당부사항과 설명이 빼곡했다. ‘임시의정원인(臨時議政院印)’이라고 새겨진 가로 5cm, 높이 6cm의 검은색 목재 도장에는 ‘1919년부터의 의정원 인장’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홍씨는 이 문서에 “임시의정원인은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수립 때부터 유일한 도장으로 임시정부 및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상징한다”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적었다. 만오 홍진 선생의 손자며느리 신창휴씨18일 미국 동무 모처에서 동아일보와 채널A에 단독 공개한 임시정부 의정원 관인 등 도장 4개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 사진 출처-동아일보‘홍진(洪震)’이라고 새겨진 옥돌로 만든 작은 도장에는 ‘관용’ 및 ‘공문서’에 쓰였다는 말도 있었다. 이 외 만오 선생이 1919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법관과 변호사로 일하며 썼던 그의 본명 홍면희(洪冕熹)가 새겨진 도장, 또 다른 호 ‘만호(晩湖)’가 새겨진 도장도 1점씩 있다. 임시정부 연구의 권위자인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임정에서 행정부 수반(국무령)과 입법부 수반(임시의정원 의장)을 모두 지낸 분은 홍진 선생이 유일하다”며 “가장 오랜 기간 의장으로 활동하며 의회정치의 기틀을 닦은 분”이라고 설명했다. 1943년 중국 충칭에서 열린 재중자유한인대회에서 총주석 자격으로 연설하는 만오 홍진 선생의 모습. 한시준 단국대 교수 제공 / 사진 출처 - 동아일보1877년 명문가 후예로 태어난 홍진 선생은 1904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동지들을 규합해 인천에서 13도 대표자 대회를 개최하고 한성정부를 조직한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해 9월 한성정부를 법통으로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921년 5월에는 이동녕 손정도에 이어 임시의정원의 3대 의장으로 선출됐고 이어 1939, 1942년에도 의장에 선출됐다. 한 교수는 저서에서 “홍진 선생이 이념과 당파를 초월한 인물이었기에 좌우익 세력이 참여한 통일의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34회임시의정 /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이미지검색만오 홍진 선생은 임시의정원의 마지막 의장이었고 임정 환국 뒤 의정원을 계승한 비상국민회의 의장으로도 선출됐다. 홍진 선생의 후손이 의정원 관인을 보관하게 된 데에는 이 같은 사연이 있다. 홍진 선생이 1945년 12월 1일 환국하면서 가져온 의정원 문서는 손자 홍석주 씨가 보관하다가 국회에 기증해 1974년 국회도서관이 발간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최초로 규정된 ‘대한민국 임시약헌’(헌법) 개정안 초안(원본)과 건국강령, 광복군 작전보고 등 귀중한 자료들이었다. 임시정부 문서는 이들 자료 말고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의정원 문서를 온전하게 보존해 후대에 남긴 것 역시 홍진 선생의 큰 공헌으로 평가된다. 홍진 선생은 1946년 9월 9일 병환으로 숨을 거뒀고 장례식은 9월 13일 김구 선생, 이승만 박사를 비롯해 각계 인사가 운집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됐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1923년에 사용한 태극기/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이미지 검색홍석주씨가 가보로 지켜오던 이 관인은 중국 상하이에서 첫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린 지 100주년이 되는 올 4월 10일에 맞춰 기증될 것으로 전망된다. 문희상 국회의장실은 “임정 100주년을 맞는 올해 국회도서관에 임시의정원의 마지막 의장을 지낸 홍진 선생의 흉상을 건립한다”며 “상징적 의미가 큰 4월 10일 전 관인이 고국에 돌아올 수 있도록 흉상 건립을 서두르고 있다”고 밝혔다.2019. 1. 21글씨21 편집실
한국서예가 신년초대전
“한국 유명 서예가 작품, 새해 맞아 울산 나들이” 울산문화예술회관(관장 금동엽)의 2019년 첫 번째 초청기획전시 ‘한국서예가 신년 초대전’이 제1전시장에서 1월 24일부터 31일까지 진행된다. 국내 유명 서예가 30명이 참여하는 이번 전시는 깊이 있는 작품성으로 한국 서예술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작품 50점이 전시된다. 산민 이용 德(덕) 34x39cm근당 양택동 和氣以禮(화기이례) 35x140cm가장 한국적인 예술을 찾기 위해 실험과 파격을 넘나들고 스스로의 예술적 발전과 후진양성에 매진하며 국내 서예의 현대화를 이끈 대가들의 작품전이다. 호암 윤점용 代悲白頭翁 中(대비백두옹 중) 35x140cm우선 한국 문인화의 거목 창현 박종회 선생의 사의적 방식을 바탕으로 제작한 ‘유향감인’ 등과 의재 허백련 선생의 사사를 받은 남도화맥의 정수인 금봉 박행보 선생의 ‘설매’ 등 수준 높은 서화가 눈에 띈다. 금봉 박행보雪梅(설매) 70x45cm또한 대한민국 국새 글씨를 새긴 전각가이자 원로서예가인 구당 여원구 선생의 ‘장자구’와 세계에서 주목하는 소헌 정도준 선생의 ‘삼광체반’ 등이 전시돼 서예의 다양한 패러다임을 전달한다.구당 여원구 莊子句(장자구) 35x135cm소헌 정도준心廣體胖(심광체반) 69x88cm특히 이번 전시회는 문자 예술의 단초로서 서예가 단순히 먹으로 쓴 글자가 아닌 서예가의 창작성, 문자의 형식미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된 정신을 예술 자체로서 재조명하는 현대적 서예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창현 박종회 晩香倚石(만향의석) 35x138cm회관 관계자는 “한국 서예 진흥 분위기에 맞춰 울산 서예 발전과 대중화에 힘을 보태는 전시로, 관람객들이 철학적 서예술에 스며든 감각적인 필묵과 교감해 보길 바란다.”라고 말했다.기타 자세한 사항은 문화예술회관 누리집(http://ucac.ulsan.go.kr)을 참고하거나 전시교육팀(226-8251~4)으로 문의하면 된다.<전시정보>한국서예가신년초대전기간 : 2019년 1월24일(목) - 31(목)시간 :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요금 : 무료<참여작가>토우 강대희 / 호암 윤점용 / 효정 권인호산민 이 용 / 혜풍 김광희 / 석정 이재병무림 김영기 / 한얼 이종선 / 청농 문관효운당 이쾌동 / 노정 박상찬 / 취묵헌 인영선창현 박종회 / 담헌 전명옥 / 금봉 박행보토민 전진원 / 시중 변영문 / 소헌 정도준마하 선주선 / 죽림 정웅표 / 우산 송하경밀물 최민렬 / 이당 송현숙 / 무곡 최석화 시백 안종종 / 청석제 최은철 / 근당 양택동시몽 황석봉 / 구당 여원구 / 죽봉 황성현※ 가나다 순2019.1.23*보도자료 및 사진출처 : 울산문화예술회관이승민 기자
중국서법대하(中國書法大廈杯) 국제서법공모전 총상금 11억
특등상 6명 추가선정 예정 서예를 발전시키고 당대 서예와 전각 예술의 성과를 보여주며, 서예의 발전 방향을 이끌어 가기 위해 중국서법대하는 ‘제1회 中國書法大廈杯’ 공모전을 개최하였다. 작년 12월 30일까지 마감이었던 중국서법대하배 공모전은 운영위원회의를 거쳐 특등상 6명을 추가하고 마감 날짜를 2019년 3월 28일까지 연기하였다. 특등상 6명 추가로 총상금은 한화 약6억원에서 11억원으로 올랐으며, 1인당 상금은 한화 약 8,000만원이다. 특등상 6명은 원칙적으로 해서, 행서, 초서, 예서, 전서, 전각 각 1명씩 수상된다. 이외 우수상 30명(전각4명), 입전(특선) 200명, 입선100명, 조직상은 00명이다. 출품자격은 국적, 초대작가와 관계없이 만18세이상 누구나 출품할 수 있으며 실명으로 출품해야 한다. 작품 접수는 3월 28일까지 우체국 EMS로 직접 발송해야 하며, 우체국에 접수된 일자가 마감 일자를 지난 것은 무효 처리된다. 지난 12월 30일 마감으로 이미 출품한 작가들은 연기된 날짜로 다시 출품해도 무방하다.문의: 이예신 010-9060-29162019. 1. 23글씨21 편집실
서예진흥법 통과, 그 과정과 차후 방향에 대해서
서예진흥법이 통과되었다. 이제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만들어진 후 다가오는 6월부터 시행된다. 이 법안이 통과되기 까지 약 5년간의 기간이 소요되었으며, 서총의 네 단체장들의 큰 역할, 함께한 많은 의원, 입법추진위원회 등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합심하여 이룬 결과이다. 이번 인터뷰는 법안통과의 중심에 있었던 서총(한국서예단체총협희외)의 총간사를 맡고 있는 이종선 간사를 만나 법안 통과까지의 과정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자세히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2019. 1. 23글씨21 편집실 Q-1. 2013년 11월 1차 서예진흥정책포럼 개최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이전의 구체적인 시작 경위와 더불어 1차 서예진흥정책포럼의 결과는 어땠나요? 1차 포럼이 열리기 1년 전입니다. 2012년 11월,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서예부장에게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최재천 국회의원이 서예 단체장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싶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저는 미술협회 분과위원장을 해서 미술협회 대표로 가게 되었고, 서예협회는 노복환 이사장, 서가협은 김성환 이사장, 서도협은 김영기 회장님이 대표로 최재천 의원실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서단이 여러 단체로 나눠진 이래로 여러 단체장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초유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최재천 의원이 서단을 위해서 뭔가 일을 좀 해보자고 하였고, 서단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부터 이야기해보기로 했습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갔던 우리는 각자 생각나는 대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육 문제, 서예과 폐지 문제, 서예가들의 생활상 같은 얘기들을 했지요. 그러자 최의원이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대표자들이 정리했으면 좋겠다고 했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어요. 그때 요약했던 것이 서예가들의 활동 공간의 문제로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을 꼽았습니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은 생긴 이후로 20년이 지나도록 리모델링이 되지 않아 어떻게 하면 잘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있었고, 또 하나는 서예 교육에 대한 문제였고, 그리고 작가 지원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어서 그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 문제를 요약해서 최 의원을 다시 만났습니다. 최의원께서 이제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회가 활동하는 것이 좋겠다. 우선 포럼을 한 번 주기적으로 열어보자 하셨습니다. 그런 포럼을 열기 위해선 사람들이 동원되어야 하는데 그럴 때는 소속 단체 회원들이 와줘야만 했죠. 그때 각 단체 대표들이 암묵적으로 이야기를 한 것이 ‘이제 네 단체가 합심해서 같이 노력하자. 일정한 협의체도 필요한 때이다.’ 이런 이야기가 집약됐죠. 그다음 해에 네 단체장이 모여서, 이 공동 목표인 서단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협의체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서총(한국서예단체총협의회)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2013년 8월입니다. 서총을 결성하고 첫 번째 행사로 제1차 포럼을 개최한 것이 그해 11월에 열린 제1차 서예진흥포럼입니다. 서예인들이 모두 모인다고 홍보를 했고, 각 계에서 참석해주었습니다. 그때 국회의원이 열세 명이나 오셨습니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 정종섭 장관, 유진룡 문광부 장관, 교육부 장관도 오시고, 문화예술계에서는 서예계의 원로이셨던 故 동강 조수호 선생, 김동호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 혜문스님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방송·언론 쪽에서는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을 비롯한 KBS, CBS, EBS 사장님들도 오시고 각 계 알만한 분들은 전부 오신 겁니다. 모두 오셔서는 이구동성으로 ‘서단이 화합한다는구나! 정말 축하할 일이다.’라며 모두 축하해주었습니다. 침체되는 서예가 반드시 중흥을 시켜야 하는 덕목이라고 생각하며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않았죠. 그때 서예가들은 고무(鼓舞)가 되었습니다. 서예진흥을 위한 결의문도 낭독했습니다. 제1차 포럼의 의의라고 한다면 한국 서단이 서총을 중심으로 모인 것, 그리고 서예를 진흥시킬 수 있는 불씨를 하나 만들어 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Q-2. ‘서예진흥법’제정의 필요성과 당위성이 아주 중요한 요점이었을텐데요, 어떠한 방법으로 강조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우선 서예가 동양 고유의 예술이고, 또 우리 민족의 역사를 통해 면면히 이어져 온 전통예술입니다. 그런데도 교육정책이라든지 서구문물에 의해 밀려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그냥 사라지게 하면 안 되는 덕목이며, 어떻게든 계승시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또, 인성이 점차 피폐해지는 사회 문제 속에서도 서예가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미술이라는 장르를 위해 편성되는 예산이 천억이 넘습니다. 그런데 미술에 속해있는 서예는 지원이 없습니다. 그래서 법을 제정하여 서예를 보호해야겠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Q-3. 5년간의 노력 끝에 얻어낸 결과입니다. 지난 5년간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 그 과정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 부탁드립니다. 우선 초기 과정을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예진흥법을 만들기 위해서는 국회의 관심을 끌어야 하고, 또 국민적 관심을 주목받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예가 왜 필요한지, 왜 서예진흥법을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알리기 위해 네 번의 포럼을 국회에서 열게 됩니다. 계속 포럼을 개최하고 진흥법 초안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국회의원을 찾아다니면서 공동발의를 요청하고, 서예인들과 국민들에게 지지 서명을 받았습니다. 2015년 11월 최재천 국회의원이 대표 발의를 하고 119명의 의원이 공동발의를 하는 서예진흥법 발의안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열게 됩니다. 그래서 발의가 되어 교문위원회에 상정해 놓았는데, 그때 대통령 탄핵정국이 되어 국회가 열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결국 국회를 열지 못하고 탄핵이 되어 정국이 마감되어 19대 국회가 폐회됩니다. 국회가 막을 내리면 발의가 되었던 법안은 자동 폐기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들었던 법안은 제대로 상정도 못 해보고 폐기되는 안타까운 지경을 맞이합니다. 이후 20대 국회가 다시 구성되었고, 바로 유성엽 교문위원장님을 만나서 서예진흥법 대표 발의를 부탁드렸죠. 유성엽 의원은 서예에 대해 많이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흔쾌히 대표 발의를 맡아 주셨고, 다시 국회의원회관 대강당에 전국에서 모인 서예인들과 함께 서예진흥법의 당위성과 필요성에 대한 포럼을 열었고, 다시 의원들의 지지 서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법안도 다시 수정하여 작년에 재발의 하는 기자회견을 열게 됩니다. 이제 법안이 발의되면 주무부서의 검토를 거치게 되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문광부에서 미술진흥법을 문광부에서 마련하고 있어 미술진흥법이 만들어지면 서예진흥은 더불어 일어나는 것인데, 서예진흥법이 별도로 필요한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때 장관님께 이야기한 것이 지금까지 미술 속에 서예가 있으면서도 서예 쪽에 지원되는 것은 전무하다. 서예는 서예대로 살아나가는 길밖에 없다. 그동안 문광부에서 서예를 보호하고 육성하려고 노력했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법을 별도로 만들려고 하겠느냐, 지금까지 안 해온 것을 봐서 미술진흥법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꼭 필요하다는 항의 겸 협조 요청을 했고, 문광부 장관님도 동의를 해주었습니다. 또 기재부 법안에 보면 5조에 서예진흥원의 설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진흥원을 만들어서 재정을 확보하고 지원을 해야 한다는, 그런데 기재부에서는 진흥원 설립에 대해 반대를 했습니다. 이유는 진흥원이 만들어지면 정부는 거기에 대한 예산을 확보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국가 예산상 진흥원 설립은 어렵기 때문에 서예진흥법을 반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일리가 있습니다. 만들어지는 법마다 모두 그렇게 한다면 국가 예산이 감당할 수가 없겠죠. 그래서 아쉽지만 5조 진흥원 설립의 조항을 실태조사로 바꿔서 법률을 수정했습니다. 그 수정안을 가지고 유성엽 교문위원장이 바로 대표 발의를 했습니다. 국회의 운영은 전반기와 하반기로 운영이 됩니다. 그때 유성엽 위원장이 전반기 교문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 교문위를 통과했으면 하고 바라고 유성엽 의원도 노력했습니다만, 그때 또다시 국회가 정치적인 문제로 열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하반기로 넘어가게 되었고,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바람이 좋게 불어서 좋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Q-4. 20대에서 결국 성공했는데 그때의 자세한 과정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입법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서예인들의 관심을 집약시켰고, 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서예인들이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문광부하고 밀접하게 접촉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2018년 11월 23일 10시 국회 본회의가 열립니다. 국회 본회의에서 우리 안건이 열두 번째 안건으로 상정이 됩니다. 박인숙 의원이 낭랑한 목소리로 법안 발의를 했습니다. 재석 의원이 205명이었고, 그중 199명이 찬성을 하고 6명이 기권을 해서 당당하게 본 회의를 통과했습니다. 그때 아마 그 광경을 지켜보는 전 서예인이 감동 했을 것입니다. Q-6. 서예진흥법 통과까지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과 노력이 있었는데요. 한 분 한 분 소개 부탁드립니다. 우선 안팎으로 말씀을 드려야 하겠죠, 우리 서예계부터 말씀을 드리면 처음 서예진흥법을 시도할 때 온 서예인들이 반신반의하면서 믿지 않았습니다. 입법이라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보니 관심도가 아주 낮았습니다. 그 관심도를 집중시키는 일이 어려웠죠. 이 과정에서 서총 공동대표단체의 네 단체장(권인호, 윤점용, 강대희, 김영기)들이 굉장히 노력 하셨습니다. 각 단체의 관심을 집약하고 취합하고, 참여하게 하는 데 많은 일조를 하셨지요. 밖으로 보면, 많은 도움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최재천 의원님의 노고를 뺄 수가 없습니다. 그분이 없었다면 이 진흥법은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죠. 우선 본인이 국회의원이었던 19대에서 포럼을 계속 이끌어가면서 서총(한국서예단체총협의회) 탄생의 산파 역할도 직접 맡으셨던 것이고, 무산되었지만 발의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20대에 와서 유성엽 위원장이 대표 발의를 하는데에도 최재천 의원이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그분의 역할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것입니다. 백번을 말해도 부족한 내용이죠. 그다음에는 아무래도 이번 국회에서 대표 발의를 해주신 유성엽 의원의 노고를 빼먹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교문위원장을 맡으면서 교문의원들을 설득하고 대표 발의를 하여 된 것입니다. 그분의 영향이 컸습니다. 그리고 간사를 맡으셨던 이동섭 의원, 손혜원 의원, 박인숙 의원께서 문광위 위원들에게 서예진흥법이 반드시 만들어져야 한다. 조속히 처리하자고 설득하여 문광위(문화체육관광위원회)를 통과할 수 있었죠. 문광위원들에게도 고마운 것입니다. 그리고 법사위원회에서도 거부 반응 없이 그대로 통과시켜주었고, 또 본 회의를 통과하는데 문희상 국회의장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이 노력해주셨습니다. 모든 국회의원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또 드러나지 않게 지원을 해주신 서예진흥재단 홍석현 이사장님, 그 밖에 여러 문화예술계의 지지가 컸고, 예술의전당 고학찬 사장을 비롯한 직원분들도 많이 협조해주었습니다. 고마운 분들이 많습니다. Q-7. 앞으로 남은 과정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안이 남았나요? 이번에 국회에서 통과된 법안은 모법입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우리 주무 부서인 문화관광부가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행령과 시행규칙에 관한 간담회를 엊그제 문화관광부하고 진행했습니다. 그 시행령과 시행규칙은 석 달 정도에 걸쳐 수정 보안하게 됩니다. 각계의 여론도 수렴하고, 과정을 거쳐 공람을 하고 공청회를 열게 됩니다. 또 법제처에 심의를 받고 국무회의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것이 대게 3, 4, 5월을 거쳐 6월 12일부터 시행하게 되어있습니다. 이 과정은 실질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잘 만들어야 어떻게 시행할 것인가가 되는 것이죠. 우선 기본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조항이 있는데, 기본계획에도 단기 계획과 중장기 계획이 있습니다. 단기 계획도 중요하지만, 중장기 계획은 어떻게 수립하느냐에 따라 서단의 체제를 바꾸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서예 교육 문제인데, 서예 교육을 하기 위해 전문 인력이 필요하고 전문 인력을 어떻게 양성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상당히 디테일한 문제입니다. 또 교재를 개발하고 커리큘럼이 완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 서예진흥위원회 설립에 대한 필요성과 필요하다면 어떻게 만들어질 것인가에 대해 논의되어야 합니다. 법이라는 것이 너무 세부적이어도 안되고 너무 포괄적으로 해도 해석하기 어려워 모호하게 진행될 수 있기 때문에 지금 논의 과정에서 다뤄져야 할 것입니다.Q-8. 진흥법 통과로 인해 침체된 서예발전이 기대되는 가운데, 교육에 관한 방안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교육과 관련된 사항으로 어떤 것들이 논의되고 있나요? 사실 서예의 중흥이라고 하는 것은 교육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저변이 약한 것은 발전을 기대할 수가 없죠. 그 저변이 바로 학교 교육입니다. 학교 교육에 서예를 어떻게 다뤄지게 할 것 인가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서예진흥법이 여러 가지 이유로 필요하지만 어쩌면 이 서예교육 때문에 정말로 필요하다고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어떻게 서예 교육을 시키게 할 것이냐, 교육이 실시된다면 누가 가르칠 것인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가 중요한 얘기입니다. 그것이 추상적이거나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대로 장님 문고리 잡는 식으로 해서는 교육의 효과를 달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충분한 준비가 있고, 그런 다음에 실시해야 교육의 효과가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런 것을 위해 교육장을 설치하고 전문 인력을 모집하고, 교육하고 교재를 만들고, 커리큘럼을 짜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Q-9. 전국의 서예인들이 서예진흥을 위해 앞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우선 서예가 국민적인 사랑을 받으려면 서예가 서예다워야 합니다. 다른 장르와 다른 면모를 보여줘야 하는 거죠. ‘서예인들은 일반 사회인과 다르구나’, ‘역시 서예인이구나’ 할 수 있는 면모를 보여줘야 합니다. 스스로 자성도 해야 하고 행동도 조심해야 합니다. 교육에서도 마찬가지 일겁니다. 스스로 서예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서예술을 하는 서예가로서 품위를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6월 12일, 시행령이 시행되면 각 지방 자치 별로 조례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이게 모법이 되어 중앙정부에 이런 법이 있으니 우리 시, 도에서도 이런 조례를 만들어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각 지방 의회는 시행령과 시행규칙에 준해서 그 지방에 맞는 조례를 만들 수 있죠. 각 지방에서도 각자 흐트러지는 목소리를 내지 말고 같이 모여서 요구 사항을 가지고 의원들과 접촉하고 조례를 만들어 지방, 지역별로 활성화할 수 있습니다. Q-10. 이번 성공적인 법안 통과에 대해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제가 특별한 역할이 있는 것은 아니고 실무 간사로서 단체의 의견을 조율하고 조정하고 또 서단과 국회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아무도 기대하거나 믿지 않았던 서예진흥법이 만들어진 것은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기적을 만들어낸 주역이 바로 서총의 네 대표단체입니다. 그분들의 노력과 단합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거죠. 6년 전, 1차 포럼이 다시 생각나는데요. 처음으로 서예인들이 모두 모여 소리 높여 이제는 서예를 진흥시키자 결의문을 낭독했습니다. 그 소리가 귀에 쟁쟁합니다. 또 많은 분이, 사회 저명인사들이 오셔서 서단의 단합을 축하해주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여 오늘의 서예진흥법이라는 대어를 낚은 셈인데요. 하지만 이것은 법만 만들어졌다고 해서 갑자기 뭐가 좋아지거나 하지 않습니다. 서예인들은 서총이 진행되는 과정과 더불어서 앞으로 이런 단합된 힘을 결집해야 합니다. 그럴 때 정부도 우리를 지원하고, 사회가 우리를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총은 이제 법인화를 추진합니다. 그러면 서총이 대정부 창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서단의 중지(衆智)를 모아서 침체된 서예를 다시 일으키고, 다 죽어가는 서예교육을 살려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많이 지켜봐주시고 지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